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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수령 400년

예를 들면 수령 400년

예를 들면 수령 400년.

 

그 나무를 사용하는 건축은 어떤 것일까?

 

「pepita」, 그리고 새로 「승(承)~ pepita2」를 함께 만든 편집자 다카쯔씨와는 자주 그런 이야기를 한다.

 

사람이 심은 나무라면 400년전 사람에 의해 심어진 나무를 지금 사용한다는 것이 된다. 400년의 시간을 생각하고는 순간적인 현기증 같은 감각, 그 후에 「사용한다」고 하는 겸허한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내가 내가라는 마음을 일단 버리고 인간이 전부라고 하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400년의 시간은 상상할 수 없다.

 

이번에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심은 나무를 400년후에 누군가가 받는 상황을 상상한다.

끝까지 지켜볼 수는 없다.

단지 잘 자라주기를 빌 것이다. 그리고 아무쪼록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기원할 것이다.

조용히, 으쓱해진 자신을 최대한 진정시킨다.

받아서 다음 세대에 연결한다.

 

평균 수십년의 목숨을 받아 태어난 우리들은 그 몇백배나 되는 긴 시간의 띠 속의 한 순간에 태어나 다음 순간에 그 생을 마감한다.
훨씬 더 큰 시간속에서 자라 온 나무의 혜택을 받으며 살고 있다.
그 밖에도 여러가지 은혜를.

 

한편으로 이런 생활의 효율과 이익을 지나치게 추구한 결과 나무나 돌보다 인간의 사정을 우선한 것을 많이 만들어내 왔다.

도시에서 생활하는 인간은 어느새 인간의 시간보다도 짧은 시간의 존재에 둘러싸여 있다.

편리하지만 그러한 것에 둘러싸여 생활하고 있노라면 점차 잃어버려지는 감각이 있다.
 

그것은 자신보다 훨씬 큰 것으로부터의 은혜 아래서 생을 허락받고 있는 실감.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이 지배하고 있는 감각, 뭐든지 알고 있다고 하는 감각일까?

 

자신은 전부 알고 있다고 하는 감각이야말로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다리로 살고 있는 실감 그 자체를 잃게 한다.

 

자연 속에 있는 나무나 돌은 인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천천히 산다.

목조 건축, 석조 건축은 말을 하지 않지만 긴 시간을 담은 생명이 여전히 거기에 있다.

그 생명에 매일 접함으로써 깨달음은 새로워진다.

큰 것에서 허락받아 살고 있다고 하는 깨달음을 새로이 함으로써 자신만의 생명이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관계 속의 파편 하나로 살면서 비로소 생명은 가치를 가지는 것일 것이다.

그것을 잊고 사는 것은 인간뿐.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도 또한 인간뿐이다.

역시 생명은 귀중하고 감사하다.

그리고 하잘 것 없다.

고맙도다.

이노우에 다케히코

 

201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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